◆ 나의 이야기

단편소설 로또

만고 장춘 2015. 5. 23. 07:04

 

 

 

 

 

 

 

 

 

 

 

 

 

 

로 또

 

 

 

 지난 9월7일 일요일 새벽0시21분.

채구삼은 5개월 째 근무하던 24시편의점 알바에서 쫓겨났다.

9개월 전 파산결정을 받고 재기를 위해 노력했지만 나이와 경력 때문에 어느 곳에도 직장을 구할 수 없었던 그가, 비록 주말알바지만 요행이 24시에 취업하고 자신의 인생을 통해 가장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근무했는데도 불구하고 해고되었다.

 

 오늘 9월20일 토요일 밤7시49분.

채구삼은 1분전에 쳐다 본 시계를 다시 쳐다봤다.

24시에서 해고된 후 거의, 자신의 일상을 폐쇄했던 그가 TV화면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아직 11분이나 남아 있었다. 그가 이렇게 초조하게 기다리는 8시는, 파산이후 불확실하게 남은 자신의 운명을 완전하게 바꿔 놓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의 예감은 황당하거나 부질없는 상상은 아니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때로는 예감이 확신보다 정확하다. 채구삼은 그렇게 믿었다.

지난 9월6일 토요일 밤10시45분.

채구삼은 주말 근무하는 24시를 향해 방금내린 버스정류장에서 바쁘게 걸었다. 주간알바와 밤11시에 교대해야 하지만 채구삼은 언제나 15분 이르게 출근했다. 주간알바의 퇴근을 조금이라도 여유롭게 해주려는 배려도 있었지만 젊은 사람에 비해 교대과정에 필요한 시재확인, 매대정리, 재고점검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시간이 더 걸려서 항상 최소한 15분전에 출근했다.

“해피 이브닝.”

24시의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며 주간알바에게 늘 하던 버릇처럼 인사를 건네려고 했으나 주간알바는 창고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창고에 있어?”

창고 안에서 나온 사람은 주간알바가 아니고 깐깐한 인상의 40대 24시편의점 주인이었다. 주말과 주일 밤11시부터 익일오전9시까지 일한지 150일이 되었지만, 한 번도 주말이나 주일에 나와 본적이 없던 주인과 뜻하지 않게 마주치자 채구삼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잠시 머뭇거리며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쩐 일이세요?”

“몰라서 물어요?”

주인의 싸늘한 반문에 채구삼은 당황했다. 혹시 짐작할 수 없는 자신의 실수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 요? 그런 말이 나오세요?”

점화된 도화선처럼 주인의 말은 거침이 없었고, 바람에도 팔랑거릴 것 같은 표정은 날이 서 있었다. 세팔 남짓한 거리에 마주 선 주인의 까칠한 눈총은 채구삼을 어색하게 침몰시켰다. 이미 장전된 주인의 마음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제까지 주인과 마찰했던 일은 김밥의 폐기로 인한 갈등뿐이었다.

주간알바와 교대체크를 끝내고 근무를 시작하면 우선해야 하는 일이 김밥의 폐기처분이다. 새벽 0시30분에 입고된 김밥은 8시30분전에 대부분 판매되지만 때로는 판매보다 재고가 더 많을 때도 있다. 미처 판매하지 못한 김밥은 당일 밤 11시30분에 어김없이 폐기처분해야 하는 것이 24시의 규정이었다. 그러나 채구삼이 이 규정을 숙달하는 데는 5주가 걸렸다.

유년시절의 먹을거리교육이 유통기한에 대한 인식을 쉽게 풀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쌀 한 톨이라도 함부로 하지 않고 살았던 시대를 겪어낸 채구삼은, 유통시한30분전에 폐기처분하는 멀쩡한 김밥이 아까워 표시된 폐기시간을 지키는데 인색했다. 그러나 젊은 주인은 24시편의점규칙을 어기고 유통기한만료인 24시까지 폐기하지 않고 버티는 채구삼의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몰려든 손님을 맞느라 유통기한을 25분이나 넘기고 김밥을 판매했다 주인에게 심하게 질책당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채구삼은 철저하게 당일 11시30분의 폐기규정을 지켰다.

그 외엔 전혀 주인과 트러블이 없었다. 오히려 항상 긍정적이고 친절한 채구삼의 손님대응에 만족해했던 주인이었다.

 

 지난 8월9일 토요일 11시41분.

오늘도 출근하자마자 후면에 인쇄된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폐기해야 할 김밥을 선별해서 포스기로 가던 채구삼은 유리문 앞에 서 있는 낯선 소녀를 발견했다.

주택가의 24시편의점이어서 거의 안면이 있는 고객들이지만, 유리문 앞에 서 있는 소녀는 근무한지 5개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얼굴이었다. 새로 이사 온 아이라고 생각한 채구삼은. 충분히 열고 들어 올 수 있는 나이임에도 선뜻 유리문을 열지 못하는 소녀가 마음에 걸려 재빨리 유리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공주님.”

활짝 열린 유리문을 보고도 소녀는 여전히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 오, 이 바람 때문에 그러는구나. 괜찮아, 이 바람은 에어커텐이라고 벌레 못 들어오게 하는 거야. 자 어서 들어오렴.

소녀는 자상한 채구삼의 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채구삼이 들고 있는 김밥폐기바구니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서있었다. 채구삼은 소녀와 폐기바구니를 번갈아 본 후, 이건 폐기할 거란다 라고 말하며 소녀가 편히 볼 수 있게 바구니를 소녀의 눈높이로 낮추며 소녀가 편히 들어오도록 비켜섰다. 그러나 소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 들어 올 거니?”

채구삼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너, 이상한 애로구나.”

소녀의 태도에 기분이 상한 채구삼의 언성에 신경질이 묻었다.

“물건을 사러 왔으면 들어오든지 아니면 집으로 가든지 해라. 밤늦게 돌아다니는 거 좋은 거 아니다.”

투박한 말에 소녀가 채구삼을 똑 바로 쳐다봤다.

소녀가 쳐다보는 순간, 채구삼은 소녀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섬뜩한 초록 불을 보고 전율했다. 극히 짧은 시간 뻔쩍인 소녀의 목화/目火였지만 채구삼의 전신은 얼어붙었다. 채구삼이 아찔한 현기증을 수습하려는 찰라, 채구삼을 노려보던 소녀는 갑자기 폴짝 뛰어올라 길 건너 빌라골목으로 달아나버렸다. 그 모습이 마치 도둑고양이 같아 채구삼은 감전된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소녀가 사라진 방향만 주시한 체 서있었다.

그리고 한주일이 지났다.

주간알바와 업무교대가 끝나고 선별한 김밥을 폐기등록하고 있는데 커다란 브로치를 한 중년여자가 유리문을 열고 매장 안으로 들어 왔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는 중년여자를 본 순간 채구삼은 깜짝 놀랐다. 중년여자의 가슴에 달린 브로치에서 반사되는 초록빛이, 지난주일 소녀의 눈에서 발광했던 초록 불과 흡사했던 것이다.

채구삼은 얼른 유리문 밖으로 나갔다.

유리문 밖에서 쇼윈도안의 LED광고판을 들여다봤다. 광고판에 녹색의 대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우유광고 목장풍경이었다. 채구삼은 LED광고판을 보고, 비로소 소녀의 눈에서 본 초록불은 LED광고판에 반사되었던 것이라 믿었다.

캔 맥주 세통과 줄 김밥 그리고 담배 한 갑을 산 중년의 여자가 계산하고 돌아간 후 채구삼은 시계를 봤다. 8월17일 일요일 0시14분. 채구삼은 유리문 밖을 살폈다. 지난토요일 밤의 소녀를 무의식중에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8월23일 토요일 밤 11시43분.

막바지 더위가 턱밑까지 차오르는 주말의 늦은 밤은 냉장음료와 맥주손님만 분주하게 드나든다. 그 바람에, 미처 폐기하지 못한 김밥을 유통시한 24시에 임박해서 급하게 선별했다. 채구삼은 갑자기 뒷덜미에서 싸늘한 냉기를 느끼고 유리문 쪽을 돌아봤다.

언제 왔는지 소녀가 유리문 앞에 서있었다.

채구삼은 소녀를 보고 웃었다. 한주일 건너 나타난 소녀를 보고 웃은 것은 반갑기도 했지만, 유리문에 밀착한 소녀의 코와 입이 마치 가오리 같아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안녕? 공주님?”

채구삼은 소녀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신경질적인 태도에 겁먹고 달아났던 지난주를 기억하고 소녀에게 친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이사 왔니?”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소녀가 첫 반응을 보였다.

“그럼 주말마다 이 동네 놀러 오는 거지?”

소녀가 머리를 좌우로 또 흔들었다.

“잠잘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 잠이 안와? 더웠구나.”

채구삼은 소녀가 앞으로 쏠리지 않게 조심해서 유리문을 열었다.

유리문이 열리고 유리와 소녀의 얼굴이 분리되자 눌려졌던 코와 입술에 피가 도느라 빨개졌다.

“들어와, 물건 안사도 돼. 여긴 에어컨 없어도 시원해.”

소녀는 대답대신 채구삼의 행동을 지켜보며 문 앞에 선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지난 주일은 아저씨가 미안했어. 아직도 화 안 풀렸어?”

소녀가 세 번 고개를 흔들었다.

“왔으면 들어 와야지, 그렇게 서 있기만 할래? 문을 오래 열고 있으면 벌레 들어와. 그리고 말이야 이 김밥은 팔수 없는 거란다. 좀 있으면 새 김밥 들어와. 그때까지 안에 들어 와 기다릴까?”

채구삼은 폐기 선별한 김밥바구니를 소녀에게 보여주며 말했고 소녀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녀에게 장애가 있다고 얼핏 생각한 채구삼은 더 이상 소녀를 문 앞에 세워 두고 싶지 않았다. 비록 말을 못하거나 저능아 또는 고집 센 불량소녀라 해도 채구삼은 소녀에게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다. 소녀를 매장 안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소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채구삼은 오싹했다.

짧은 나시에 들어 난 소녀의 맨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얼음장 같은 냉기에 채구삼은 얼른 손을 떼며 말했다.

“넌 몸이 왜 이리 차갑니? 얼음 같구나”

자신의 체온에 질겁한 채구삼을 빤히 노려보던 소녀는 갑자기 울먹였다. 채구삼은 얼른 말을 얼버무렸다.

“내 말은 그게 아니고.”

허지만 소녀는 돌연, 길 건너편 빌라골목으로 날쌔게 뛰어가 버렸다. 빌라골목의 어둠속으로 소녀가 사라진 후, 채구삼은 머리위에서 쏟아지는 에어커튼의 바람에 손바닥을 댔다. 문틈에서 내려 온 에어커튼의 바람은 에어컨 같은 냉기를 느낄 순 있었지만 잠시 동안 서있었던 시간에 소녀의 어깨가 그토록 차갑게 얼었을까? 채구삼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포스기로 갔다. 그러나 머릿속은 소녀로부터 받은 그 피부촉감을 쉽게 지우지 못하고 한 주일을 보냈다.

 

 8월30일 토요일 밤 10시 31분.

주간알바와 교대를 끝내고 포스기 앞에 설 때까지 채구삼은 한 주일을 소녀의 상상으로 채웠다.

소녀의 눈에서 목격한 초록 불의 의문은 풀었지만 소녀로부터 체감했던 얼음장 같은 피부에 대한 의문은 한주일 내내 남아 있었다. 소녀의 체온에 대한 의문이 미궁으로 빠져들면 소녀의 눈에서 이글거렸던 초록불도 다시 의문으로 증폭됐다. 사람의 눈에서 어떻게 그런 광채가 날까? 그 아이는 혼혈아거나 샴유전자를 가진 특이종일까? 아니면 외계인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별의 별 생각이 들었다. 소녀의 어깨에서 느꼈던 충격적인 체온은 소녀가 좀비라는 의심도 들게 했다. 아무리 설득력 있게 임상과학 또는 이상유전자현상으로 해석해도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소녀에 대한 의문이 길어질수록 묘한 그리움도 함께 쌓였다. 채구삼은 쌓이는 의문과 그리움만큼 소녀를 분석했다. 그의 분석은 기다림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김밥을 선별하면서 자꾸 유리문 쪽을 돌아봤다.

그가 소녀를 기다리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밤 11시45분부터 일요일 새벽0시30분 사이에 찾아오는 소녀에게, 폐기한 김밥을 주기로 작정하기까지 그는 무척 갈등했다. 먹어서 해가 없는 폐기김밥이라 해도 페기된 것을 소녀에게 주는 것은 포만보다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이 일을 주인이 알면 그냥 넘어 갈까? 그렇다고 시급을 받는 주제에 매번 새 김밥을 사줄 수도 없어 채구삼은 많은 고민을 했다.

허지만 채구삼은 차선차후를 따지지 않기로 작정했다.

아무리 먹어도 돌아서면 허기질 나이에 김밥을 사먹을 형편이 아닌 집 아이라면 차선차후가 문제일 수 없었다. 지난주일 나타나지 않아서 불안하긴 했지만 오늘은 꼭 나타날 것이라 예감하고 채구삼은 포스기에 폐기등록한 김밥을 냉동실보관에 넣지 않고 비닐봉지에 담았다. 그리고 그는 소녀를 기다렸다.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 예감했다.

소녀를 기다리면서 조금 전에 들여다 본 시계를 또 들여다봤다. 그 사이 시계바늘들은 일요일 새벽0시15분으로 회전해 있었다. 그가 시계에서 시선을 뗀 바로 그때였다.

홀연히 소녀가 유리문 앞에 서 있었다.

채구삼은 얼른 김밥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잘 지냈어? 이거 받아. 오늘은 아저씨가 네게 이걸 주려고 기다렸단다.”

“뭔데요?”

“삼각김밥.”

“얼마에요?”

“돈은 필요 없어. 이건 어차피 버릴 거야, 허지만 먹어도 돼, 유통기한이 15분밖에 안 지났거든.”

“제가거진줄아세요?”

소녀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채구삼은 당혹했다. 자신의 선심이 소녀에게 민감한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염려하긴 했지만 막상 소녀의 분노에 직면하자 얼얼하도록 무안했다. 채구삼은 얼결에 소녀의 손을 잡으며 사과했다.

“아니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아저씨도 이 김밥 먹는 단다. 볼래? 한번 먹어볼까?”

채구삼은 소녀에게 내밀었던 비닐봉지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꺼내 황급히 비닐포장을 벗겼다. 그때 소녀가 천 원짜리 한 장을 채구삼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건 뭐냐?”

“김밥값요. 허지만 이 돈은 행운의 돈이에요. 70억도 될 수 있는 돈이에요.”

“70억? 허지만 아저씬 이돈 안 받아. 그냥 가져가. 이건 팔 수 없는 거야.”

“진짜 저를 거지로 취급하실 거에요?”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이 돈 받으세요. 이 돈 속엔 행운의 숫자가 있어요. 행운의 비밀숫자를 찾는 건 아저씨 몫이지만요.”

채구삼은 난처했다.

소녀로부터 천원을 받지 않으면 소녀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줄 것 같고, 내밀었던 삼각김밥을 주지 않으면 더 큰 모욕을 주는 것 같았다. 잠시 혼란에 빠졌을 때, 소녀는 채구삼이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낚아채, 길 건너편 빌라골목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녀에게 천원을 돌려주고 싶지만 따라 갈 수는 없었다. 24시를 한 순간도 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9월6일 토요일 10시45분.

채구삼은 소녀가 주고 간 천 원짜리를 호주머니에 넣고 24시에 출근했다. 평소처럼 교대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한 채구삼은 24시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며 반갑게 주간알바를 찾았다.

“해피 이브닝!”

24시의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가며 주간알바에게 늘 하던 버릇처럼 인사를 건네려고 했으나 주간알바는 보이지 않았다.

“창고에 있어?”

채구삼의 말에 창고 안에서 나온 사람은 화가 난 주인이었다. 주인은 대면과 동시에 거칠게 대했다.

“혹시 내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어요?”

“몰라서 물어요?”

“요즈음은 김밥폐기도 제시간에 하고 이벤트도 충실히 챙겨드리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네요.”

“그렇게 시치미 잡아떼시면 끝나는 줄 아세요?”

“뭐가요?”

“정 그렇다면 여기로 와서 똑똑히 보세요.”

주인은 냉동실 옆의 컴퓨터테이블로 채구삼을 데려가서CCTV기록화면을 검색했다. 화질은 떨어졌지만 CCTV화면엔 편의점 안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것까지 다 기록되어 있었다. 검색하던 주인이 김밥을 비닐봉투에 담는 채구삼을 정지 시킨 후 화면을 응시한 체 말했다.

“꼭 봐야 알겠어요?”

“CCTV각도에 따라 상황이 달라 보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기계니까요.”

다소 누그러진 감정으로 주인은 화면의 일시정지를 해제했다. 화면 속의 그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녀로부터 천원을 받는 장면이 나왔다.

“할 말 있으세요?”

채구삼이 황급히 반박했다.

“저건 돈 받은 게 아니구요.”

“그럼, 팁 받은 거에요?”

채구삼은 당시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통할 리 없었다. CCTV영상엔 채구삼이 소녀에게 폐기된 삼각김밥을 판매하고 돈 받는 장면이 분명히 찍혀있었다. 그 장면 때문에 24시 주인은 경찰서에 출두했고 채구삼은 주인에게 횡령으로 몰려 해고되었다. 다행이 주인은 영업정지 없이 벌금형으로 풀려났지만 채구삼의 오해는 끝내 벗지 못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처지가 이런 곳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유통기한 지난 김밥 팔아먹는 인간은 아니에요. 이 나이에 천 원짜리 한 장 먹자고 그런 짓을 하다니요?”

“증거가 명백하잖아요. CCTV에 분명히 그 여자애로부터 돈 받는 장면이 찍혔는데 발뺌하세요? 그나마 한번이라 다행이지 계속됐다면 어쩔 뻔 했어요? 소문나 보세요. 어떻게 되나? 그러기에 제가 몇 번이나 말했어요? 폐기음식 유출시키면 절대 안 된다고.”

소녀가 애처로워 단 한번 폐기김밥을 주긴 했으나 이런 음모에 휘말릴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채구삼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24시를 나섰다.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던 채구삼이 되돌아서며 주인에게 물었다.

“잠깐요, 그 아이가 어디 산데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익명으로 신고했으니까요.”

“익명으로도 고소가 됩니까?”

“그래서 경찰이 우리가게 CCTV복사해 간 겁니다.”

“그럼 제게 전화라도 주시지 그랬어요?”

“처음부터 아저씨가 우리 가게에서 일하실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구요, 큰 기업까지 하신 사장님인데 이런 일로 인격에 흠이 가게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그것이 아저씨에게 해드릴 수 있는 예의잖아요?”

같은 교회에 출석하던 장로의 종교적 진심을 믿었다 순식간에 파산했을 때보다 더 기가 막혔으나, 돌이킬 수 없는 엄연한 증거를 쥔 주인에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에게 해고당하고 24시편의점을 나온 채구삼은 운행이 끊긴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며 문득 건너편 빌라골목을 쳐다봤다.

골목 어디엔가 소녀가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소녀를 찾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아니 찾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죽했으면 포상금을 노리고 그런 음모를 꾸몄을까? 기껏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선심을 배신한 소녀가 괘씸하거나 가증스럽기보다 오히려 그 소녀에게 연민마저 느꼈다. 평소에도 정이 많고 너그러운 채구삼이지만 파산 후 받은 시련이 모든 사고에서 그를 더 광활하게 했다.

빌라골목은 밖에서 볼 때 보다 아주 길고 협소했다. 빌라골목의 끝머리에 넓적한 마을공원이 있었다. 채구삼은 공원안의 가로등그늘이 깊게 드리워진 벤치를 골라 앉았다. 끝물여름의 새벽공기는 서늘한 가을기운이 감돌았다.

새벽첫차버스시간을 기다리며 채구삼은 소녀와의 기이한 만남을 되새겼다. 아무리 소녀의 소행을 괘씸하게 생각하려해도 어쩐 일인지 미워할 수 없었다. 소녀가 궁금했다.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던 초록빛무리와 얼음처럼 차갑던 어깨를 떠올리면 움츠러드는 두려움도 들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녀가 신비했다. 유리문에 밀착해서 그린 가오리얼굴이 떠올랐다. 한번이라도 더 소녀를 만나고 싶었다.

채구삼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봤다.

소녀의 생각을 털어내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밤하늘의 별들도 흔들렸고 별들이 흔들리는 만큼 심하게 어지러웠다. 몹시 어지러웠다.

“아저씨.”

가냘픈 여자아이의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깼다.

공원가로등을 등지고 소녀가 채구삼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아니 넌?”

“아저씨.”

“또 나를 골탕 먹이려고 나타난 거냐? 허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을 테니 어쩐다니?”

“여기서 뭐하세요?”

“보면 몰라?”

“아저씬 왜 이렇게 바보 같아요?”

비꼬는 듯도 하고 야유하는 것 같기도 한 소녀의 치명적인 말에도 채구삼은 빙그레 웃었다.

“진짜 바보니까 그렇지.”

“아저씨.”

“왜 불러? 귀찮게.”

“아저씨가 왜 바보 같다고 했는지 아세요?”

“바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저씬 예전처럼 곧 부자가 될 수 있는데도 노숙자처럼 공원에 앉아 있으니 바보 같잖아요.”

“내가 다시 예전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네에 진짜요.”

“얘야, 난 이젠 부자가 될 수도 또 꿈도 꿀 수 없단다. 그러니까 나를 이젠 그만 놀리렴. 나를 저 앞의 24시에서 쫓겨나게 만들어 놓고 또 놀리면 너 엉덩이에 솔 난다.”

“솔이 뭐에요?”

“솔이란 말이다, 부스럼 같은 거야. 아주 아아주 고약한 거지.”

“제가 아저씨한테 행운을 드렸는데도요?”

채구삼은 자신을 부당하게 해고당하게 한 소녀였고, 해고되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소녀와 함께 있는 것이 싫지 않았다. 오랫동안 이런 마음을 가져 본적이 없었다. 겉으론 큰 사업이었지만 항상 쫓기고 항상 불안했던 과거보다, 소녀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차츰 더 편해졌다.

“그런데 네 이름이 뭐냐?”

“아저씨에게 행운의 천원 드린 거 잊으셨어요? 그게 제 이름인걸요?”

“행운의 천원? 무슨 그런 이름이 있냐?”

“그 말을 거꾸로 짧게 줄여 보세요.”

“천원행운? 천행운?”

“맞았어요. 천행운이에요. 그게 제 이름이에요.”

채구삼은 얼른 주머니 속의 천 원짜리를 기억해 냈다.

폐기한 삼각김밥을 가져가면서 던지듯 소녀가 주고 간 그 천 원짜리였다. 이번 주일 소녀를 만나면 돌려주려고 했으나 갑자기 해고당하는 바람에 잊고 있었던 천 원짜리를 얼른 주머니 속에서 꺼내 소녀에게 내밀었다.

“천행운! 이름이 참 예쁘구나. 이제 이 돈은 돌려주마.”

그러나 소녀는 채구삼이 내민 천 원짜리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그 돈은 아저씨 거에요. 제가 아저씨께 드린 행운이에요. 받은 행운은 돌려주는 게 아니에요. 행운은 쉽게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소녀의 말에 채구삼은 천 원짜리를 앞뒤 뒤집어 봤다. 아무리 살펴봐도 보잘 것 없는 천 원짜리 한 장이었다.

소녀가 말을 이었다.

“그 천 원짜리는 행운의 숫자가 있는 특별한 돈이에요.”

“그런 허무맹랑한 말에 내가 또 당할 거 같으냐?”

채구삼의 말에 소녀는 기이하게 웃었다. 소녀가 웃을 때 소녀의 눈동자에서 초록불이 빛무리졌다. 그러나 처음처럼 오싹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채구삼이 그동안 쌓였던 의문에 대해 묻기 전에 소녀가 먼저 말했다.

“아저씨. 제가 드린 천 원짜리 속에 70억의 행운을 찾는 숫자가 있다는 거 꼭 기억하세요. 아셨죠? 전 이제 가야 할 시간이에요. 날이 밝았거든요.”

숨 쉴 틈 없이 말을 마친 소녀는 이번에도 도둑고양이처럼 휙 날아서 공원 반대편의 빌라골목으로 뛰어가 버렸다. 채구삼도 소녀의 뒤를 따라 달려가며 소리쳐 소녀를 불렀다.

“얘, 행운아! 행운아!”

순식간에 공원담장을 뛰어넘어 간 소녀를 뒤따라 달려갔지만 소녀의 행적은 막 여명이 시작되는 빌라골목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의 자취를 찾기 위해 몇 바퀴째 빌라골목을 맴돌던 채구삼은 낙담해서 시계를 쳐다봤다. 첫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 온 채구삼은 저녁 무렵이 되어 거리를 헤매 다녔다. 주말알바를 구하는 24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한동안 거리를 헤매던 채구삼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갈증을 풀기위해 편의점을 찾던 채구삼의 눈에 현수막대자보가 들어왔다.

로또명당, 1등당첨점, 누적예상당첨금70억, 등의 글자가 쇼윈도를 완전히 덮고 있는 로또판매점 앞에서 채구삼은 갈증도 잊고 소녀의 말을 떠올렸다.

로또당첨예상금액 70억이란 글자에서 채구삼은 묘한 흥분을 느꼈다. 소녀가 했던 말도 70억이었고 로또판매점의 누적금액도 70억이었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엔 소녀의 말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예언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천 원짜리를 펴 보았다. 천 원짜리엔 생각보다 많은 숫자가 인쇄돼있었다.

CK4938165K.

채구삼은 호흡을 가다듬고 천 원짜리의 일련숫자를 읽어보았다.

“쉽게사구삼팔일육오케이.”

채구삼의 눈엔 CK가 쉽게, 5K가 오케이로 읽혔다. 오케이란 발음이 채구삼을 흔들었다. 이끌리듯 로또판매점 안으로 들어갔다.

로또판매점 안의 맞은편 벽에는 수없이 많은 당첨번호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었고 그 아래 기다란 간이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엔 이미 여섯 남자와 말년에 가까운 한 여자가 상반신을 엎드린 채 열심히 로또번호를 선택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남자는 옆 사람이 볼 수 없게 한 손으로 로또용지를 가리고 있었다. 꼭 면허시험장에 들어 온 기분이었다.

기다란 테이블엔, 창가에 한자리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채구삼은 얼른 그 자리로 가서 주머니의 천 원짜리를 꺼냈다.

“이 돈 속엔 행운의 숫자가 있어요. 행운의 비밀숫자를 찾는 건 아저씨 몫이지만요.”

소녀가 했던 말이 난청이 되어 귓속에서 공명했다. 채구삼은 호흡을 가다듬고 긴 테이블의 필통에 꽂혀 있는 로또용지를 뽑았다.

채구삼은 로또용지의 두 자리 우선으로 천 원짜리의 숫자를 선택한 후, 컴퓨터 펜으로 거침없이 막대를 긋고 입 속으로 오케이라고 중얼거렸다.

4. 9. 38. 16. 5.

허지만 천 원짜리의 숫자는 로또용지의 다섯 칸을 메우고 끝이었다. 아무리 다시 조합해도 남은 한 칸을 채울 숫자가 없었다.

난감한 채구삼은 창 너머 지나가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을 바라보며 남은 한자리 수가 뭘까? 골몰했다.

머리를 용량대로 풀가동해서 굴려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행운, 아니 70억은 한 자리 숫자만 틀려도 허탕이라는 생각에 난감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로또용지와 창 너머 풍경을 번갈아 바라보던 채구삼은 주머니에 넣었던 천 원짜리를 다시 꺼내 보았다. 혹시 소녀가 남기고 간 다른 흔적이라도 있나 해서 천 원짜리를 창문에 대고 비춰보았다. 그러나 천 원짜리엔 더 이상의 표시나 비밀숫자는 없었다. 천 원짜리를 바지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으려던 채구삼은 극적으로 숫자하나를 발견했다.

천 원짜리에서 두 번째 큰 숫자였다.

1000.

즉시 로또용지의 붉은 네모 칸을 채웠다.

10.

 

 오늘 9월20일 토요일 밤8시1분.

광고 없이 로또추첨이 시작되었다. 투명한 로또추첨기가 UFO처럼 빙글빙글 돌아가자 그 속에서 숫자가 표시된 오색 공들이 뒤엉켜 구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추첨기가 멈추고 한 개의 공이 굴러 나왔다.

16.

채구삼은 얼른 자신의 로또용지에서 숫자를 확인했다. 있었다. 분명히 16이란 숫자가 있었다. 소녀가 주고 간 천 원짜리로 로또를 구입하면서 확신은 했지만 첫 번째 숫자 16이 확인되는 순간 그의 심장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5.

두 번째 숫자는 5였다. 역시 있었다. 채구삼은 진동하는 긴장감을 느끼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9.

세 번째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은, 네 번째 숫자를 연상해서 받는 압박감이 겹쳐 호흡마저 불규칙했다.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고공다이버의 심정과 같았다. 로또추첨기는 잠시도 딴청을 부리지 않고 돌았다.

38.

봤다. 추첨기에서 공이 굴러 나올 때 분명히 숫자38을 봤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로또용지에서 숫자 38을 확인 또 확인했다. 그사이 다섯 번째 추첨기가 돌아갔다.

4.

왔다. 올 것이 오고 있다는 확신에 채구삼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 마지막 한자리라고 생각하자 혈압이 급상승했다. 속앓이 같은 가슴통증을 느꼈다. 채구삼은 가슴에 두 손을 얹었다. 극도의 흥분과 긴장감 때문에 추첨 기를 도저히 지켜 볼 수 없었다. 파산이후 거의 하지 않던 기도를 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주님을 떠난 이후 저는 베드로와 같은 고통에 처해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행하셨던 기적을 저에게도 지금 내려 주옵소서. 저에게 마지막 행운이 당도하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이 행운이 저를 다시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그리스 이름으로.”

채구삼이 기도를 끝내고 있을 때 아주 낯익은 소리를 들었다.

“십! 이번 주 마지막 숫자는 십 번입니다. 당첨을 축하합니다.”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9월20일 일요일 오전5시49분.

이제 막 침실커튼에서 새벽이 벗겨지는 시간, 침대에서 심하게 몸부림치며 잠꼬대하는 채구삼을 아내가 흔들어 깨웠다.

“여보! 또 꿈꾸는 거야?”

채구삼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자마자 주위를 더듬으며 말했다.

“여보, 봤지? 우리가 당첨되었어. 70억이야 70억!”

“무슨 소리하는 거에요?”

“로또라니까. 70억! 70억!”

“이젠, 당신 치매까지 오는 거 아니에요? 웬 날벼락 같이 70억이에요?”

“아휴, 먹통! 지금 우리가 70억에 당첨됐단 말이야. 이젠 걱정 없어!”

“여보, 제발 애들 깨기 전에 정신 좀 차리세요.”

침실커튼으로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채구삼은 꿈의 잔영에서 오랫동안 깨지 못했다. 아내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러 나간 후에도 채구삼은 멍하니 앉아 꿈과 현실의 사각지대에서 진공상태가 되어있었다.

 

 9월20일 일요일 오전8시10분.

아이들은 주일의료봉사활동에 나가고 채구삼은 아내와 단둘이 식탁에 마주 앉았다. 꿈의 여운을 완전히 털어버린 채구삼을 보고 아내가 먼저 웃었다.

“이제 꿈깼어요?”

“웃지 마! 우리인생도 꿈이고 개꿈도 꿈이야. 개꿈처럼 언젠가 우리인생의 꿈도 깨고 말테지만, 결코 우린 개꿈처럼 깨지는 말자.”

“그럼요 힘들어도 후회 없게 살아야죠.”

아내의 말에 문득 생각난 듯 침실로 들어갔다 나오는 채구삼에게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만둔 지 벌써 2주가 되었네요. 이젠 24시에 안 나갈거에요?”

“나가야지, 다른데 알아보고 있어. 아참 이거.”

아내는 채구삼이 불쑥 내민 종이 한 장을 받아들었다.

“또, 로또네?”

“어제 24시 알아보다 한 장 샀어. 허지만 이젠, 이따위 종이 한 조각에 매달리지 않을 거야. 이거 당신이 버려버려.”

“오천 원짜린데? 그리고 금주 건데?”

“오늘 새벽, 개꿈 깨고 깨달았어, 이렇게 사는 것만 해도 우리에겐 행운이야. 과거의 미련 때문에 부질없는 요행을 기다리면, 우리의 이 행복도 천행운이 될 거란 예감이 들어.”

아내는 채구삼이 말하는 천행운이란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왕 산거니까 토요일까지 기다려 보는 게 어때요? 아깝잖아요. 혹시 알아요? 당신이 말하는 천만분의 일, 천행운이 찾아올지도?”

채구삼은 아내의 아쉬워하는 표정을 들여다보며 파산 전처럼 호탕하고 소탈하게 웃었다.

“그렇게 말리더니 이젠 당신한테 옮아갔나보네? 하하하 으하하하. 고약한 놈”

채구삼을 따라 아내도 잔주름 속에서 보조개가 살아나도록 웃었다.

아내가 로또용지를 찢어 창밖에 뿌린 후, 흩날려가는 로또용지를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맞아요. 언제나 당신이 옳아요. 천만분의 일 행운을 잡으려다, 낭패 볼 수 있겠죠.”

채구삼도 바람에 조각조각 날려가는 로또용지를 아내의 어깨 너머로 훔쳐보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 아내가 찢어 날린 로또용지의 다섯줄 6자리숫자들 속에 금주당첨번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어쩌면 영원히 모르는 것이 채구삼의 행복이고 채구삼의 진짜행운인지 모른다.

6. 11. 17. 24. 31.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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