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 초 최고의 외과의사 장기려 박사
대한민국 건국 초 최고의 외과의사 장기려 박사
6.25사변 때 북에 두고 온 아내 때문에
평생을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사시다가 돌아가신 분.
1947년 1월. 평양의과대학(김일성대학 의대)외과
교수 있다가 6.25사변 때 월남하여
1979년 8월. 막사이사이상 수상 했으며
1951년 6월. 복음병원을 개원하여
수많은 환자를 인술로서 치료하고
돈이 없어 퇴원을 못하고 걱정하는 환자를 보면
몰래 원장이 야간에 직접 후문을 열어주어
도망가게 하였습니다.
1968년 5월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 시작 하였으며
그는 이산가족상봉 1순위 기회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후순위로 미루었습니다.
누구보다 고통 받는 자들의 마음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북에 두고 온 아내의 목소리를 녹음기로만 들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떨리는 손으로 녹음기를 틀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아내의 목소리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보고 싶고 그립고, 또 보고 싶은 당신께…….”
결국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아내를 목소리로만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바보 "장기려 박사"라고 까지 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습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 병원(현제고신의료원) 원장으로 40년,
복음 간호 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묘지 10평조차 없었습니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습니다.
장 박사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습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습니다.
원래, 잇속이 밝지 않아 셈을 잘 할 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장 박사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도 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이어서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환자들이 하소연을 하면,
장 박사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했습니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장 박사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했습니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
장 박사는 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하라고 알려주고는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 주기도 했습니다.
장 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북녘에 두고 온 아내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주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재혼 하라고 권해도
끝내 마다하고 홀몸으로 살았습니다.
평생에 걸쳐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진실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랑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정신의 꽃을 피워냈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로 불렸습니다.
장기려 박사에 관한 이야기는 한도 없이 많지만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임들 오늘도 행복 하세요